제 759 호 [교수사설] 워렌 버핏과의 점심식사 그리고 천천히 걸어가기
섬기고 있는 교회의 목사님(정원교회 임호순 목사님)께서 “사랑의 편지: 행함”이라는 주제로 설교를 하시는 와중에 ‘행함’의 의미가 2가지, 즉 ‘행동’과 ‘걷는 것’이라는 사실과 특히 본문에서는 후자의 의미라는 것을 언급하셨다. 뛰어가거나 날아갈 필요가 없는, 즉 걸어가는 것의 쉬움을 강조하신 것이다. 아울러 목사님께서는 이와 관련 워렌 버핏을 인용하셨다. 그와의 점심 식사가 고액의 비용을 치러야 할 정도로 그는 유력한 사람이었지만(점심시간 3시간에 7억 2천만원 기부 형식) 65세가 된 이후 현 재산의 90% 이상을 형성하였고 나아가 (한 청년과의 점심식사에서는) 자신이 부자가 될 수 있었던 비결로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부자가 되는 것을 꼽았다는 사실을 소개하셨던 것이다.
우리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빠른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초고속 인터넷, 즉각적인 메시지, 실시간 정보 갱신이 자연스러운 시대에 기다림은 불편함이 되었고, 속도는 경쟁력이 되었다. 그러나 과연 빠름이 곧 옳음인지, 모든 것이 신속해야만 가치 있는 것인지는 고민이 필요하다. 당해 고민 앞에서 우리는 잠시 멈추어 설 필요가 있다. ‘느림의 미학’은 바로 그 멈춤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대학은 본래 사유의 공간이다. 생각은 숙성의 과정을 필요로 한다. 씨앗이 나무로 자라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듯, 자신의 꿈을 이루어 가는 것, 그리고 그러는 와중에 형성되는 습관과 인격은 긴 시간의 축적 속에서 가능한 것이다. 주변에서는 속도의 논리만을 강조하면서 한눈팔지 말고 앞을 향해 서둘러 뛰어가라고 재촉한다. 빠른 성과, 즉각적인 결과, 단기간의 업적이 강조되면서 느린 탐구는 종종 비효율로 간주되고 있기도 하다.
칸트는 근대 철학을 집대성하였다는 평가를 받는 위대한 업적을 남겼지만, 그의 삶을 보면 그는 천천히 하지만 꾸준히 연구에 몰두했을 뿐이다. 평생 독신으로 산 칸트는 자신이 태어난 도시 쾨니히스베르크(Königsberg(현 러시아의 칼리닌그라드). 그는 쾨니히스베르크가 위치한 동(東)프로이센 지방을 평생 벗어난 적이 없었다고 한다)에서 하루 중 시간을 정해 산책하며 느긋한 사유를 하였고, 다만 그 시간을 철저히 지켰다. 마을의 여성들은 칸트의 산책 모습을 보고 저녁 식사를 준비할 정도로 그의 시간 사용은 철저했고 여유로웠다(어느 날은 마을 대부분 집이 저녁 식사를 제때 하지 못했는데 그날은 칸트가 산책을 나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일 칸트는 어떤 책을 읽느라 산책 시간을 깜박했었던 것인데 그 책이 루소의 ‘에밀’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화이다). 그와 같은 여유로운 삶의 리듬 속에서 칸트는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그리고 판단력 비판 등의 위대한 저작을 거뜬히 완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그는 63세에 이르러 자신의 집을 소유하였고 쉰일곱 살에 이르러 첫 번째 위대한 저작인 ‘순수이성비판’을 출간하였다. 천천히 나아가는 느림의 미학, 그리고 그 소중함과 가치를 어렵지 않게 간파할 수 있는 실례라고 생각된다.
앞서 언급한 목사님께서는 당해 설교에서 천천히 걷는 것이 쉽지만 어렵다고 하셨다. 왜냐하면 ‘계속’ 걸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새 학기가 시작됐다. 신입생들과 재학생들 모두 새로운 꿈과 포부를 가지고 열심히 한 학기를 보내게 될 것이다. 공부의 깊이, 수업 중 하게 될 토론의 성숙, 선․후배간 관계의 신뢰는 모두 시간을 필요로 한다. 서두름은 때로는 오판을 낳고, 지나친 조급함은 시간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인공지능으로 대표되는 전혀 새로운 영역을 빨리 정복하라는 우리 사회의 무언의 압박은 서두름과 조급함이 당연하다고 강조하지만, 다각적인 고민을 전제로 하는 사유의 중요성과 그 가치는 여전히 소중하다. 우리에게 한 발짝 늦추는 용기가 여전히 필요한 이유일지도 모른다. 빠름 속에서 방향을 잃지 않기 위해, 우리는 때때로 의도적으로 느려져야 한다. 속도의 시대에 느림을 선택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지적 품격의 시작일 것이다. 상명인 모두의 방향은 정해졌다. 속도가 문제다. 꿈을 이루기 위한 일 년 그리고 한 달 계획도 좋지만, 우선 오늘 할 일에 집중하고 그것을 해냈으면 자족하고 자신을 다독이는, 그런 후 또 천천히 하지만 꾸준히 걸어가는 여유롭고 느긋한 상명인이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