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46 호 [교수칼럼]서른 즈음에
“무분별한 시절의 불 꺼진 유쾌함이 / 어렴풋한 숙취처럼 나는 힘겹네. / 하지만 포도주처럼 지난날의 슬픔은 / 내 영혼 속에서 오래될수록 더 강하네. / 나의 길은 우울하네. 미래의 요동치는 바다는 / 노동과 비애를 내게 명하네. // 하지만, 오, 벗들이여, 나는 죽고 싶지 않아. / 사색하고 고통받기 위해 나는 살고 싶다. / 슬픔과 근심과 동요 가운데 / 향락이 내게 있을 것임을 나는 아네. / 때로는 다시 조화에 흠뻑 취하리라. / 창조물 위에 눈물을 쏟으리라. / 그리고 아마 내 슬픈 석양에 / 사랑이 작별의 미소로 빛나리라.”
러시아 시인 알렉산드르 푸시킨이 쓴 「비가(悲歌)」라는 시다. 서른 무렵, 20대의 삶을 뒤로 하고 새로운 삶의 문턱에 선 인간의 착종된 내면 풍경이 펼쳐진다. 속절없이 흘러간 날들에 대한 아쉬움으로 인한 애수가 영혼에 넘쳐난다. 허무에 신음하는 시인은 마땅한 만족을 주지 않는 노동으로 가득 찰 불분명한 삶의 앞길을 불안에 차서 바라본다. 과거도 현재도 끔찍하고 미래는 너무도 불분명해서 삶의 소망 자체가 사라질 지경이다. 하지만 시인은 내면의 한 축에 자리한 염세적 절망에 맞서며 삶에 대한 여전한 희망을 품는다. “노동과 비애”의 우울한 미래를 예견하면서도 동시에 장중한 음조로 “미래의 요동치는 바다”에 뛰어들리라 말한다. “슬픔과 근심과 동요”의 연속인 삶에 대한 믿음과 열망을 외친다. “하지만 오, 벗들이여, 나는 죽고 싶지 않아. 사색하고 고통받기 위해 나는 살고 싶다.” 비극적 허무를 딛고 삶을 예찬한 시인 푸시킨의 면모를 대변하며 그의 삶의 신조를 표현하는 시구가 그렇게 태어난다. “사색하고 고통받기 위해” 사는 삶이란 어떤 삶인가? 왜 인간은 그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푸시킨이 “벗들”에게 고백한 성년의 삶을 대하는 자세는 그의 동시대인을 향한 말을 넘어 ‘인간다운 삶’에 대한 보편적 호소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바로 “사색”과 “고통”이 지닌 인문적 의미 때문이다. 인문, 곧 ‘인간다움’의 기초는 자유다. 인문학의 어원인 라틴어 ‘artes liberales’가 인간이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는 기술’을 뜻하듯, 인간은 자유로울 때 인간다울 수 있다. 사색이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 인간은 자신과 삶, 그리고 세계를 부단히 성찰하며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는 존재이기를 그치고 자유로운 ‘단독자’의 삶을 정립해 나간다. 사유함은 곧 자유롭게 됨, 자기 삶의 주인으로 섬을 의미한다. 고통은 창조적 의지로 삶과 대결하는 자유로운 인간이 감내해야 하는 몫이다. 혼돈과의 고통스러운 대결의 과정을 거쳐 “향락”과 “조화”와 창조의 기쁨의 순간이 삶에 찾아온다. 인간은 자유롭기에 혼란스러운 삶의 흐름 속에서 실수와 죄악을 저지르고 그 책임을 감당한다. 사색하는 인간에게 실수와 죄악이 남긴 정신적 상흔은 부정의 대상이 아니라 성찰의 동기가 된다. 이렇게 고통은 또한 삶에서 빚어진 실수와 죄에 대한 기억과 책임감의 소산이다. 묵을수록 더 향기를 발하는 포도주와 같은 정신적 상흔을 안고 기로에 선 「비가」의 인간처럼, 고통받는 인간은 망각하지 않는 인간이다. 과거의 어두운 면모는 소중히 안고 살아가야 할 삶의 자산이다. 양심의 고통이 촉발하는 실수와 죄악에 대한 성찰을 통해 인간은 도덕적 성숙을 향해 나아가기 때문이다. 설익은 젊음을 뒤로 하고 두려움에 맞서 싸우며 담대히 혼돈의 삶을 헤쳐 나가는 인간, 그 과정에서 실수와 죄악으로 얼룩진 삶을 부단히 성찰하며 도덕적 성숙을 향해 나아가고 창조적 정신으로 실존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는 인간, 그것이 「비가」를 통해 대두되는 성숙한 인간의 모습이다. 격정의 20대를 보내다 어쩌면 삶의 허망함에 절망하고 희뿌연 눈보라에 가려진 길 앞에서 주저앉을지 모를 청춘에 이 ‘슬픈 노래’를 바친다.
글로벌지역학부 최종술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