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70 호 [교수칼럼] 신입생에게 들려주는 개구리 이야기
국어교육과 최홍원 교수 새로운 출발을 시작하는 신입생에게 난데없이 개구리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하니, 시작부터 낯설고 의아할 수 있다. 힘들고 고단한 입시를 끝내고 대학에 들어선 신입생들, 그리고 24절기 가운데 만물이 깨어난다는 경칩(驚蟄), 그 사이에 ‘개구리’가 있다. 새로운 출발을 시작하는 신입생에게 개구리는 몇 가지 당부의 말을 꺼내기에 알맞은 대상인 것이다. 개구리는 우리에게 친숙한 동물이다. 연령대에 따라 개구리를 잡고 놀았던 추억을 지닌 이가 있는가 하면, 실물보다는 만화 속 캐릭터가 더 친숙한 이들도 있다. 독특한 외모와 울음소리는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켜서 여러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저주로 인해 개구리로 변했다는 설화가 서양 곳곳에 펴져 있고, 그림형제의 ‘개구리 왕자’는 이 같은 사유가 만들어 낸 대표적인 작품이 된다. 먼저, 끓는 물에 집어넣은 개구리는 바로 뛰쳐나오지만, 물을 서서히 데우게 되면 개구리는 물이 뜨거워져도 변화를 모르다가 결국 죽게 된다는 실험에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물론 현대의 과학자들은 이와 다른 실험 결과를 내놓기도 한다.) 흔히 ‘끓는 물 속의 개구리’로 비유되는 ‘삶은 개구리 증후군(Boiled frog syndrome)’은 점진적으로 고조되는 위험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거나 그에 대한 적절한 대응을 놓치게 되면 결국 화를 당하게 된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대학생활의 낭만에만 빠져서 천천히 끓고 있는 물을 인지하지 못하고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게 될 것을 경계하는 말이다. 둘째, 바깥 세상의 형편도 제대로 모르면서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을 가리켜 ‘우물 안 개구리’라고 한다. 여기서 개구리는 자신의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대표적인 상징인 셈이다. 그런데 장자에 나오는 이 이야기에서 정작 개구리의 상대역이 누구였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개구리에게 넓은 바깥 세상을 이야기하는 이는 바로 동해의 거북이다. 천리의 거리, 천리의 높이로도 크기와 깊이를 형용하기 어려운 곳이 바다라고 한다. 물의 많고 적음에 따라 줄어들지도 늘어나지도 않는 곳, 그곳이 바로 바다인 것이다. 이 이야기는 좁은 우물 안에 갇혀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은 아닌지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그리고 좁은 우물을 박차고 넓고 넓은 바다를 향해 힘찬 첫 걸음을 내딛어야 함을 깨닫게 한다. 다음으로 우리 고전으로 옮겨가면 개구리는 또 다른 화두를 던져준다. 오늘날 개구리는 불법 포획이 금지될 만큼 보호해야 할 대상이지만, 이전에는 잠 못 들게 하는 소음의 대명사로 여겨져 왔다. 잠을 깨우고 잠을 못 들게 했던 만큼 옛 사람들이 개구리 울음소리에 반감을 드러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이러한 개구리 울음소리를 통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새롭게 깨닫게 된 사연도 여러 글에서 만나볼 수 있다. 인조의 측근이었던 장유(張維)는 시끄러운 개구리 울음소리를 듣고서 그것이 제 본성대로 우는 것임을, 그리고 그 울음이 인간에게 큰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점을 포착해 낸다. 나아가 인간이야말로 보고 듣고 먹기에 즐거운 사물은 마음껏 이용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없애려 드는, 듣기 싫은 소리를 내는 ‘큰개구리’라는 생각에 이른다. 김수항(金壽恒) 또한 마찬가지였다. 개구리의 울음소리가 자연의 법칙에 따른 것이라면, 인간이야말로 하늘이 부여한 자연스러운 삶을 거부하고 온갖 가식과 허위로 뒤덮여 있는 존재인 것이다. 이들은 모두 개구리의 울음소리를 통해 인간과 사물의 관점을 동시에 취해야 함을 들려준다. 그리고 나의 아집과 편견에서 벗어나 다른 시선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함을 일깨운다. 이옥(李沃)은 이와 다른 입장을 보이고 있어 흥미롭다. 떼를 지어 모이면 소리가 나는 만큼, 개구리 울음소리가 시끄러운 것은 당연하다고 한다. 그런데 찬찬히 다가가서 하나하나 들어보면 한 마리가 내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는 각각의 사연이 있고 감정도 배어 있다고 한다. 개구리 울음소리를 뭉뚱그려 소음으로 들을 것이 아니라, 그 사연과 감정을 읽어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세상의 여러 사람들이 내뱉는 말과 사연을 개구리 울음소리에 빗대고 있음을 간파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들을 뭉뚱그려 소음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그 속에 하나하나의 애환에 귀 기울여야 함은 물론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주변에는 여러 소음들로 가득하지만, 관심과 애정이 더해지면 그 속에서 하나하나의 존재가 내는 특별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와 같은 속담처럼, 개구리는 여러 관용구에 인기있는 대상으로 빈번하게 등장한다. 그만큼 개구리는 우리 삶에서 놓치지 않아야 할 여러 가치와 교훈을 전해주는 대상이 되어 왔다. 신입생 여러분들에게 개구리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앞으로 대학 생활은 여러분에게 쉴 틈없이 ‘끓는 물’을 쏟아붓기도 하고, 여러분을 좁은 우물에서 넓은 바다로 끝없이 밀어내기도 할 것이다. 이를 단순히 개구리에게 국한된 이야기로 치부할 수 없는 것은, 미래를 대비하여 ‘공간을 파괴하라!(stretching space!)’, ‘지식을 재신임하라!(retrust knowledge!)’고 외친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의 주장과도 겹치기 때문이다. 또한 대학 생활은 그동안 입시에 매몰되면서 자신만을 향했던 시선을 거둬들이고,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폭넓게 바라보고 다르게 접근할 것을 요청한다. 나의 편견과 아집 대신,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다양하게 바라보고 생각하는 시간 속에서 이전과 다른 변화와 성장을 기대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대학 생활은 주위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하나하나의 삶에 담긴 고민과 사연에 귀 기울이면서 함께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경험하는 시간으로 채워지기를 희망한다. 여러분에게 개구리는 어떤 대상이며 무엇을 생각하게 하는지를 묻는다. 상명의 가족이 된 신입생 여러분을 환영하면서 이것으로 그 인사를 대신하고자 한다.
제 670 호 [사설] 내 안의 빈 공간, 감동의 시작
밥 중에 배고플 때 먹는 밥이 가장 맛있다. 배가 부르면 진수성찬을 앞에 두고도 젓가락질을 멈출 수밖에 없는 법이다. 밥맛은 본래 그런 것이다. 이 묘한 관계를 다른 일에도 대입할 수 있다. 이를테면 수업을 듣는다든지 과제를 할 때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시장기가 밥맛을 돋우듯, 수업과 과제에 대한 흥미를 돋우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내 안에 채움을 기다리는 빈 공간을 마련하는 일이다. 그것은 부족함이나 불완전함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내 안을 무언가로 가득 채우고자 하는 열정을 뜻한다. 채워도 채워도 끝이 없을 것 같은 마음속의 공간 말이다. 이 마음은 빳빳한 마분지가 아니라 얇은 습자지와 같아야 한다. 그래야만 무엇이든 잘 빨아들일 수 있다. 혹여 질기고 억센 막이 내 마음의 문을 막고 있다면 그 딱딱함을 걷어내고 미세한 바람에도 일렁이고 잔잔한 습기에도 젖을 수 있는 부드러움을 되찾아야 할 것이다. 청춘이 아름다운 것은 목마름과 굶주림 속에서 끊임없이 지성과 감성의 샘물을 찾아 헤맬 수 있기 때문이다. 지성과 감성의 샘물 맛이 더 차고 맛있게 느껴지는 까닭은 다름 아니라 그 목마름과 굶주림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목마르고 굶주린 마음을 가지고 있는 걸까? 새 학기가 되면서 신입생과 재학생들이 강의실을 부지런히 오가며 바쁘게 대학 생활을 시작하고 있다. 그런데 수강 신청을 하는 순간부터 과제를 제출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어떤 마음인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이냐에 따라 공부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공부가 대학 생활의 전부는 아니므로 공부 이외의 일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때로는 철학적 고민도 필요하고, 때로는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도 필요하다. 문학은 내가 사는 세상을 풍요롭게 확장시켜 줄 것이고, 예술은 절망하지 않도록 나를 지탱하는 힘을 줄 것이다. 그러므로 내 안에 빈 공간이 넉넉해야 한다. 그 공간이 있어야 주변의 것에 대해 호기심도 생기고 소중히 품을 수 있는 나의 계획도 세울 수 있다. 그래야만 내 안에 그 모든 것을 억지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마치 배고픈 사람이 밥을 먹듯이 담아낼 수 있다. 내 안에 내가 너무 많아 빈 공간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비워야 한다. 교만 속에서 싹튼 껍데기에 불과한 명예심이나 나만 잘 되고자 하는 이기심이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정작 중요한 것은 내가 느끼는 나인데, 남에게 잘 보이는 싶은 마음 때문에 가식적인 모습으로 꾸미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 마음속의 갈등으로 인한 잡다한 소음과 세상적인 욕망의 속삭임에 현혹되어 나다운 나를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 나는 부족한 것이 없기에 혼자서도 잘 살 수 있다는 지나친 자신감에 차 있거나 나는 가망이 없고 여전히 안 될 거라는 지나친 상실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별 것 아닌 일에 감동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런데 별 것 아닌 일에 감동하려면 내 안에 빈 공간이 많아야 한다. 목이 마르고 배가 고파야 한다. 진정한 신앙인이라면 성령에 대한 사모함이 절절하고 진정한 학생이라면 배움에 대한 갈망이 넘쳐나고 진정한 교수라면 학문과 교육에 대한 바람이 남 다르다. 우리 대학교의 인재상은 “감동을 주는 혁신형 인재”이다. 누군가에게 감동을 주려면 내가 먼저 감동할 수 있어야 한다. 혁신이라는 과제의 시작은 바로 감동을 받고 감동을 주는 아주 본질적이고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현대 문물의 빠른 변화 속에서 정신을 차리기 어렵고 뭐가 옳은지, 어떻게 사는 게 맞는 건지, 정신적 유대감을 상실하게 만드는 사회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더욱 절실하게 내 본연의 느낌이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내가 느끼는 배고픔은 어제의 배고픔에 대한 기억도 아니고 누가 강요해서 느끼는 것도 아니다. 전적으로 나의 배고픔이기에 이를 해결할 음식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선다. 마찬가지로 내가 호기심과 소중한 것에 대한 도전에 굶주려 있을 때 나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내 공부와 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집중하며 성취하게 된다. 거기엔 어떤 세속적인 욕심이 개입하지 않는다. 순연한 목적에 의해 추구하는 노력은 그래서 아름답다. 그리고 진정한 감동이란 바로 그런 곳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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