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 호 보통의 행복
송지민 정기자
끼익… 쿵.
그냥 잠깐만 눈 감고 있으면 돼.
그냥 잠깐만 자는 척하면 돼.
그냥 잠깐만… 그럼 금방 끝나.
몇 개월 전, 나와 내 동생은 고모네로 들어왔다. 고모와 고모부는 따뜻한 분들이셨다. 그 집에는 사촌 오빠가 한 명 있었고, 오빠의 역할은 철부지 아들인 듯했다. 우리에게는 작은 방 하나가 내어졌고, 그곳에는 어린이를 위한 어쩌고의 책들이 가득 찬 책장과 당시 여자아이들에게 인기가 좋았던 실바니안 인형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밥 먹을 시간이 되면 언제나 우리가 좋아하는 반찬이 식탁에 놓여 있었고, 주말이면 다양한 테마파크에 데려가서 놀아주는 그 집이 나는 꽤 마음에 들었다. 아빠와는 자주 만났다. 아빠는 우리를 위해 밤낮 구분 없이 열심히 일하는 듯하였고, 그 덕에 우리는 사고 싶은 것, 배우고 싶은 것 상관없이 모두 할 수 있었다. 아빠를 만날 때면 눈빛에서 미안함과 사랑함이 느껴져, 떨어져 사는 것쯤이야 하나도 서운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 집에서의 생활에 안심하며 이 정도면 행복하다고 생각할 때쯤, 불행이 찾아왔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나와 내 동생은 작은 방에서 자고 있었고, 잠자리에 예민했던 나는 바로 알 수 있었다. 누가 들어왔다. 문이 열리는 소리였고, 지금은 내가 뒤척여서 가만히 있지만 분명히 누가 들어왔다. 나는 고모가 우리가 잘 자고 있는지 잠깐 확인하러 들어온 줄 알고는, ‘고모, 왜?’라며 깜깜한 어둠 속에서 물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고, 나는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잠에 들었다. 착각이 아니었다. 며칠 후, 다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가만히 있었다.
처음에는 무슨 일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단지 사촌오빠가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그렇기에 고모와 고모부 몰래 나를 괴롭히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느낄 수 있었다. 이건 말하면 안 될 것 같다는 것을, 내가 말함과 동시에 이 집에서의 안정감이 깨질 거라는 것을. 아픈 건 참을 수 있었다. 나는 원래 주사도 잘 맞았고, 치과에서도 절대로 운 적이 없으니까. 나는 꽤 용감했고, 나와 내 동생은 더 이상 갈 곳이 없다고 생각했기에 나는 더 용감해질 수밖에 없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했던 부분은, 매일 그런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아무래도 나와 내 동생 둘 중 한 명이라도 잠에서 깨면 안 되니까 조심하는 듯했다. 이렇게 조금의 안심이라도 한 게 화근이었을까. 똑같이 문이 열리고 잠깐의 정적 뒤에 나기 시작하는 미세한 발자국 소리는 어딘가 이상했다. 나에게 오는 것이 아니었다. 심장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혹시 어두운 탓에 나를 못 알아보나 싶어 이불을 걷어차 나와 동생의 키 차이를 보여줬다. 그럼에도 미동 없는 듯한 모습에 생각했다. 오늘은 내가 아니구나. 심장이 너무 뛰어서 숨이 가빠진 탓에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지만, 일단 오빠를 멈춰 세우기 위해 잠에서 깨고 있는 척을 했다. 계속해서 뒤척이며 웅얼웅얼 해대자 조금 뒤에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지금까지 참고 있는 줄도 몰랐던 눈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렇게 긴 밤을 보내며 생각한 끝에 나는 결정을 내렸다.
다음 날 아침이 밝았고, 나는 아침밥을 먹으며 고모한테 말했다. 나 이제 방 혼자 쓸래, 얘랑 같이 쓰기 싫어. 동생은 서운해 보이는 듯한 얼굴을 했지만 어쩔 수 있는 도리가 없었다. 고모는 다정한 말과 함께 몇 번 나를 설득했지만 나의 완강한 태도에 사춘기가 일찍 왔나 싶어 끝내 수긍해주었다. 그렇게 동생은 나한테 크게 삐져 며칠간 심술을 냈지만 고모와 함께 잘 수 있게 되었고, 나는 그걸로 되었다. 그 이후부터는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냥 비슷한 날들의 연속이었고, 나는 그런 조용한 불행에 익숙해져 갔다.
조금 더 커서 내가 겪은 것들이 무슨 일이었는지 알게 되었을 즈음에는 내 안에 자기혐오라는 싹이 자라나고 있었고, 무수하게 긴 밤 동안 너무 많은 물을 주었는지 깊게 뿌리를 내렸다. 나는 내가 깨끗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생각과 함께 언젠가부터 하루에 서너 번의 샤워를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면 씻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건지, 까슬까슬한 타월로 살갗이 다 벗겨질 때까지 계속했지만 통증은 느끼지 못했다. 그래, 통증이 필요했다. 그게 몸이든 마음이든.
모든 것에 대한 화살을 나에게로 돌렸다. 내가 말을 잘 안 들은 탓에 엄마와 아빠가 헤어졌고, 그로 인해 이렇게 된 것이다. 밤이 늦도록 오지 않는 엄마한테 귀찮게 전화하지 말걸. 기다리지 말고 자고 있으라 할 때 그 말을 잘 들을걸. 아빠한테 전화해서 엄마가 아직도 오지 않았다고 아빠는 언제 오냐며 보채지 말걸. 둘이 싸우던 그날, 자는 척하지 않고 말리기라도 할 걸. 그냥 내가 미안하다고, 씩씩하게 잘 지내겠다고 말할걸. 다 나 때문이다.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아서 이렇게 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것의 퍼즐이 맞춰지는 듯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영문도 모르는 이 불행을 탓할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러, 새로운 흉터가 생겼다 옅어지기를 반복하던 어느 날,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내게 위로를 건넸다. 다닌 지 그리 오래되지도 않은 수학학원의 선생님이셨는데, 정말 뜬금없이 지나가는 듯한 말로 “힘든 일 있으면 말해, 선생님이 다 도와줄게.”라는 것이었다. 수업이 끝난 뒤에 독서실로 가서 생각했다. 나는 분명 여느 날과 다름없이 웃음을 잃지 않았었다. 작은 농담에도 잘 웃어 보였는데…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그 혼란도 잠시, 공책 위로 뚝뚝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자기가 뭘 어떻게 해줄 건데, 이제 와서 뭘 어떻게’와 같이 꼬인 생각들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보다 더 크게 든 생각은 이런 나라도 위로받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것이었다. 난생처음 받아 본 위로였다. 그렇기에 진심이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물론 나는 선생님께 실제로 말하진 않았지만, 머릿속에서는 모든 것을 말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선생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셨다. 그러고는 내 잘못이 아니라고 하셨다. 어쩌면 그토록 듣고 싶은 이야기였다. 그럼에도 그동안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이유는, 나는 미워할 사람이 필요했고 미운 만큼 실제로 괴롭힐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으니까. 그리고 내가 나를 위로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정말 내 잘못이 아니라면… 내가 아닌 누군가에게 그게 맞다고 확인받고 싶었으니까. 그런데 이제 되었다. 비록 상상일 뿐이었지만 그 덕에 나는 그날 밤 잠에 드는 것이 무섭지 않았고, 오랜만에 조금 행복했다.
불행과 행복의 총량은 정해져 있는 걸까. 그 뒤로 나는 감사하게도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아빠는 재혼을 했고, 나에게는 다정한 엄마와 사랑스러운 막내 동생이 생겼다. 또, 가끔 주말 저녁에 만나 맥주 한잔하며 편하게 수다 떨 수 있는 친구들도 있고, 아무 말 없이 바라보기만 해도 좋은 남자 친구도 있다. 그런데, 이들과 지내다 보면 가끔 내가 지금 너무 행복한가 싶은 생각이 들어 무서워질 때가 있다. 행복이 다 채워져 또다시 불행이 찾아올까 봐. 그래서 습관처럼 스스로를 우울하게 만드는 시기가 있는데, 그간의 날들을 다시금 생각하며 저 밑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결코 나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만둘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게 내가 나의 행복을 안전하게 지키는 방법이니까. 그래야 안심이 되니까.
나는 앞으로도 지금처럼, 딱 보통만큼만 행복하고 싶다.